소련의 지원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둘째, 월남전과 관련하여 중국이 베트남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김일성이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65년의 미국의 월맹폭격개시와 한일협정의 체결은 북한으로 하여금 소련과 더욱 접근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셋째, 중국에서는 문화
정책을 선언하면서 중국을 비롯한 여러 개발도상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소련일변도 정책을 신중하게 재검토하게 된다. 소련은 미국과의 데탕트를 추진하면서 중국과 그 외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였고 이에 중국과 북한의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소련이 과연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가
러시아와의 관계는 북한과 관계의 대칭적인 것으로써, 급격히 강화되었다가, 이제 역시 북한과 다름없는 보편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는 러시아와 남북한간의 상호 경쟁적이고 제로섬적인 역학이 구조적인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측의 대 러시아외교도 적
관계를 맺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우선적인 임무로 제기하였다.
국가수립 이후 북한외교정책의 전개는 소련과 국교수립으로 시작되었다. 1948년 10월 8일 김일성 수상은 스탈린에게 양국간의 외교·경제관계를 설정하여 대사를 교환할 것과 긴밀한 경제적 연계를 맺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북한에 북한에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중국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문화혁명 세력은 김일성의 이러한 태도에 배신감을 느끼고 김일성을 심하게 비판했는데, 이로써 북한과 중국은 냉랭한 관계가 되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자주노선을 내걸고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추구
중국과 북한 간에는 깊은 혁명적, 정서적 연대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 간의 이념적 논쟁에 이어 양국간에도 1960년대부터 이념논쟁이 불거졌다. 1980년대 이후에는 중국이 경제발전을 최우선 국가정책목표로 설정하고, 실리외교를 추진하면서 양국간 점차적 괴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1992년에
러시아와 몽골, 베트남과 우호관계 기본조약처럼 “안보위협 발생시 지체 없이 상호 접촉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신조약을 가조인한 후 2000년 2월 9일 평양에서 ‘조∙러 친선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에 정식 서명하였다.
그 후 2001년 4월에는 북한 군사대표단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양국 간 방
북한은 모든 경제부문에서 구조적으로 공급부족현상(shortage of supply)이 지속되고 있으며 식량난 에너지난 원자재난 외화난등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경제 외교 등의 위기 속에서 체제유지와 경제회생을 위하여 북한의 정책방향은 과연 어디로 이행될 것이며 클린턴정부시절 일부 평화무
정책 중요성의 의미
- 북한의 대외정책이 한반도 안보정세 변화초래
- 국내문제의 해법이 대외정책과 연관
- 남북한관계 및 통일문제와 연관
김정일 정권은 북한정권 수립 50주년(9,9절)을 계기로 공식 출범하였으며 김일성 사망 후 현재까지 과도기 과정이라면 공식출범 이후의 시기는 체제안정
6월에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홍성남 내각 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했다. 이는 19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의 중국 방문 이후 총리급 이상으로는 8년 만의 방중이었다. 따라서 김영남의 중국 방문은 1992년 4월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을 끝으로 끊어졌던 양국